대한민국 초대 대통령 이승만에 대한 평가는 늘 뜨겁습니다. 특히 그가 과연 '진정한 독립운동가'였는지에 대한 논란은 끊이지 않는데요. 일각에서는 그를 다른 독립운동가들을 깎아내리고 심지어 '친일파' 행적까지 보였다고 비판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의 생애와 당시의 국제 정세를 면밀히 들여다보면, 단순한 흑백 논리로는 설명하기 어려운 복합적인 면모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과연 이승만의 독립운동은 어떤 모습이었을까요? 그의 복잡한 행적을 통해 진실에 다가가 봅니다.
혼돈의 구한말, 서구 문명을 접하다
이승만은 1875년 조선에서 태어났습니다. 고종 재위 시기에 어린 시절을 보냈고, 과거 시험을 준비하며 서당을 다닌 전형적인 구시대 인물이었습니다. 그러나 1894년 갑오개혁 이후 서양식 근대 학교가 생겨나면서 그의 삶은 전환점을 맞습니다. 영어, 수학 등을 배우고 서양 선교사나 교사들로부터 서구의 발전상과 당시 조선의 낙후된 현실에 대한 교육을 받으면서, 그는 조선의 근대화와 변화의 필요성을 절감하게 됩니다.
이처럼 서구 문명과 국제 정세를 일찍이 접한 그는 답답함을 느끼고 계몽 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합니다. 그는 조선이 '정신 차리고 변화해야 한다'고 외치며, 당시 시대상에 대한 강한 비판 의식을 가졌습니다.
감옥에서 시작된 사상 정립 : '독립 정신'과 오해
젊은 시절 이승만은 독립협회 활동 중 고종 폐위 음모에 연루되어 감
옥에 갇히게 됩니다. 실제로 연루되었는지 여부는 불확실하지만, 그는 수년간 옥고를 치르며 고문과 고생을 겪습니다. 이 감옥에서 그는 '독립 정신'이라는 책을 집필합니다.
문제는 이 책의 일부 내용이 오늘날 '친일파' 논란의 근거로 사용된다는 점입니다. 1904년에 완성된 이 책에는 "일본이 고맙다", "일본을 부러워한다"는 표현이 있었다고 전해집니다. 당시 조선은 아직 일본의 식민지가 완전히 되지 않았던 시기(1910년 한일 병합 전)였으므로, 이러한 표현은 논란의 여지가 충분합니다.
하지만 그의 주장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서구의 민주주의와 발전된 제도를 동경하고, 당시 조선의 왕정 체제와 양반-노비 신분제 등 후진적인 모습에 대한 강한 혐오감이 담겨 있었습니다. 그는 서구 강대국들이 발전하는데 조선은 여전히 뒤처져 있다는 점을 지적하며, 국제 정치의 역학 관계 속에서 조선이 처한 위협(특히 러시아 제국의 야욕)을 경고했습니다. 당시 이승만은 일본이 청나라로부터 조선을 독립국으로 만든 것을 긍정적으로 평가하며, 일본의 메이지 유신과 근대화를 부러워했던 것입니다. 이는 정보가 제한적이었던 당시 시대상과 급진 개화파들의 시각을 고려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들은 청나라의 속박에서 벗어난 것이 일본 덕분이라고 생각했고, 일본이 자신들을 병합하려는 속셈을 미처 파악하지 못했을 수 있습니다.
미국 외교관으로서의 좌절과 국제정치 전문가의 길
러일 전쟁(1904년 2월 발발)이 터지자, 한반도를 둘러싼 열강의 야욕이 노골화됩니다. 뒤늦게 위기감을 느낀 고종은 미국에 도움을 요청하기 위해 이승만을 특사로 파견합니다. 1904년 11월, 감옥에서 막 출소한 이승만은 미국으로 향합니다.
1905년 2월, 그는 미국 국무장관 헤이(Hay)를 만나 조선을 도와주겠다는 긍정적인 답변을 얻어냈지만, 불과 몇 달 뒤인 7월, 헤이 장관은 사망합니다. 이어서 8월에는 일본과 미국의 가쓰라-태프트 밀약이 체결됩니다. 이 밀약은 일본이 대한제국에 대한 지배권을 확립하는 것을 미국이 용인하고, 미국은 필리핀을 점유하는 것을 일본이 인정하는 내용을 담고 있었습니다. 이승만이 시어도어 루스벨트 대통령을 만났을 때, 대통령은 원론적인 답변만 했을 뿐 이미 뒤에서는 밀약이 진행 중이었습니다.
외교적 성과 없이 조선으로 돌아오지 않은 이승만은 오히려 학업에 정진합니다. 조지 워싱턴 대학교에서 정치학 학사, 하버드 대학교에서 역사학 석사, 그리고 프린스턴 대학교에서 정치학 박사를 취득하며 한국인 최초의 박사가 됩니다. 이 학위 과정은 당시 교단의 후원금으로 이루어졌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그는 국제정치 전문가로서의 입지를 다지게 됩니다.
'스티븐스 저격 사건'과 이승만의 논리
이승만 박사의 국제정치적 시각이 가장 명확히 드러나는 사건 중 하나는 1908년 스티븐스 저격 사건입니다. 친일 행각을 벌이던 미국인 외교관 스티븐스를 두 명의 독립운동가(장인환, 전명운)가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암살했습니다.
당시 미국 한인 사회에서는 체포된 두 독립운동가를 변호하려는 움직임이 있었고, 이승만에게 변호를 요청했습니다. 그러나 당시 하버드대 석사 과정 중이던 이승만은 변호를 거절하고, 오히려 신문에 사설을 게재합니다. 그의 사설 내용은 대략 이렇습니다.
"지금 일본은 미국에서 조선인들이 야만적이라고 선전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미국의 외교관을 미국 땅에서 암살하는 것은 독립운동 행위가 아니라, 오히려 미국인들에게 조선인들의 이미지를 더욱 나쁘게 만들고 미국이 조선을 도와줄 명분을 없애는 일이다. 미국은 조선에 관심도 없는 나라인데, 이런 행동은 결국 조선에 대한 이미지를 훼손하고 독립에 필요한 강대국의 도움을 멀어지게 할 뿐이다."
이러한 주장은 당시 다른 독립운동가들로부터 '친일파', '독립운동 방해꾼'이라는 비난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이승만의 관점은 시종일관 일관되었습니다. 그는 미국이라는 강대국의 도움이 없이는 조선이 독립하기 어렵다고 보았고, 이를 위해 미국 내에서 조선인의 이미지를 좋게 유지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판단했습니다. 그의 자서전에는 스티븐스 암살 사건 이후 미국 언론들이 조선인을 '야만적이고 위험한 사람들'로 묘사했으며, 자신조차 미국인 친구들에게 외면당했다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와이 한인 사회에서의 갈등과 '갱스터' 오명
1913년 이승만은 하와이로 건너가 독립운동 자금을 모으고 한인 사회의 독립운동 역량을 결집하려 했습니다. 그러나 하와이에서도 다른 독립운동가들과 극심한 갈등을 겪습니다. 특히 무장 투쟁을 주장하는 세력(예: 박용만 선생 세력)과 이승만의 외교 및 실력 양성 노선은 정면으로 충돌했습니다. 이승만은 당시 미국과 일본이 동맹 관계에 있었으므로 무장 투쟁이 오히려 불리하다는 국제정치적 현실을 강조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상대 세력은 이승만을 비난하며 '하와이 갱스터'라는 오명을 씌웠다는 주장도 제기됩니다. '갱스터'라는 표현은 당시 격렬한 내부 분열과 상호 비방 속에서 상대방을 깎아내리기 위한 과장된 표현이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실제로 이승만이 갱단을 조직하여 한인 사회를 장악했다는 명확한 증거는 없습니다.
또한, 1916년 이승만이 하와이 현지 미국 신문에 '반일적 내용을 가르치지 않는다'는 칼럼을 게재한 사실도 그에게 '친일파' 프레임을 씌우는 빌미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 글의 말미에는 "하와이 일본인들은 우리 한국인들도 하나의 민족으로서 생명과 자유, 행복에 관한 천부적 권리가 있음을 잊지 말아라"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었다고 합니다. 이는 '모든 인류를 사랑하는 기독교적 원리'를 내세우면서도, 한국 민족의 독립과 인권이라는 궁극적인 목표를 잊지 않았음을 보여주는 대목입니다. 그는 일본인을 무조건적으로 증오하는 교육보다는, 한국인의 이미지를 관리하고 국제 사회의 지지를 얻어 독립을 이루려는 현실적인 접근을 시도했던 것입니다.
복합적인 독립운동가라고 해야하나?
이승만의 독립운동 행적은 '친일' 혹은 '애국'이라는 단순한 이분법으로 재단하기 어렵습니다. 그는 당대 조선의 후진성에 대한 깊은 혐오감, 서구 문명과 국제 정치에 대한 깊은 이해를 바탕으로 자신만의 독립 노선을 구축했습니다. 다른 독립운동가들과의 갈등은 이러한 노선의 차이에서 비롯된 것이지, 단순히 독립을 방해하려는 의도에서 나온 것이라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그의 방식은 때로 비판받을 수 있지만, 당시 매우 제한적인 정보와 열악한 환경 속에서 조선의 독립을 위해 강대국의 협조를 얻으려 했던 현실주의적인 외교 전략가로서의 면모를 간과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이승만은 한국인이 미국 내에서 좋은 이미지를 유지하고, 국제 사회의 지지를 얻어 독립을 쟁취해야 한다고 일관되게 주장했습니다.
그를 단순히 '친일파'로 매도하는 것은 그의 복잡한 생애와 당시의 시대적 맥락, 그리고 그의 국제정치적 통찰을 온전히 이해하지 못한 결과일 수 있습니다. 이승만은 우리가 흔히 상상하는 단일한 모습의 독립운동가가 아니라, 시대의 혼란 속에서 각자의 방식으로 독립을 꿈꾸었던 수많은 독립운동가들 중 한 명이었습니다. 그의 행적은 대한민국 독립의 복잡한 과정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한 축을 담당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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